소설/용사한테는 이길 수 없다

제3장 여동생에게는 이길 수 없다

창고0 2020. 3. 18. 20:56

답례? ……왜 답례를?”


나는 방과후, 시낭송부 부실을 방문한 칸다에게 물어보았다.

3명한테 답례를 하고 싶다.

칸다는 겐지하고 카츠아키한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그렇게 말한 것이다.


다들 나한테 요시카와와 오카시마 그리고 코마바군하고 더 사이가 좋아질 계기를 주었잖아?

그러니까 꼭 답례가 하고싶어서.”


정말로 예상도 못했던 일에 나는 아아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가까이 경과했다.

우리들의 힘에 대해서 처음에는 코마바가 시시콜콜 캐물었지만,

최근에는 다른 곳에 흥미있는 일이 일어난 건지 캐묻는 일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니까 그 사건은 내 안에서 이미 끝난 이야기가 되었다.

그 이야기가 다시 나올 줄은 생각도 못해서 ‘답례를 하고 싶다.’라는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딱히 신경 안써도 된다니까 저런 것은.

우리들은 카스미양을 위해서라면 불 속이든 물 속이든 갈테니까.”


겐지가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칸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거기다 모두하고 또 느긋하게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꼭 집에 와주었으면 해.”


카스미양의 집에?”


. 이삿짐 정리로 바빴으니까 권하는 게 늦어졌지만, 어때?”


3명이서 서로 마주보자, 겐지도 카츠아키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적어도 권유를 기뻐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말하면, 가고 싶지 않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고 빛의 파동을 쬐고 싶지 않다는 것도 있지만 새삼스럽게 답례라니 뭔가 멋쩍다.


……역시 폐가 될까?”


우리들의 표정을 간파했는지 칸다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카츠아키는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해주시다니 정말로 영광입니다. 그렇죠, 테츠지로군?”


? , 그래. 그렇지.”


이야기에 차여 그렇게 대답하니 칸다의 얼굴이 확하고 밝아졌다.


정말로? 기뻐. 그럼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 테니까 부활동이 끝나면 부르러 와줄래?”


? 가는 거 오늘이었어?”


, . 역시, 너무 갑작스러웠지……?”


칸다는 성급함과는 반대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야기 전개가 빠르다.

의외로 귀가후는 분주해지는 것일까. 이삿짐의 정리로 바빴던 것 같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딱히 상관 없어, 오늘이라도. 어차피 내일도 모레도 우리들한테 예정같은 건 없으니까.

도서실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어, 간다면 지금부터 바로 가자.”


어머, 부활동은 괜찮은거야?”


언제나 잡담만 하고 아무것도 안해. 그만하고 싶을 때가 부활동 종료 시간이야.”


너무 노골적인 겐지의 말에 칸다는 곤혹스러워 하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책상하고 의자밖에 없는 부실을 보고도 몰랐던 거야?’라는 말을 삼키고 나는 알려주기로 했다.


겐지의 말대로 우리는 부활동다운 활동은 하지 않아.”


그런거야?”


실제로 부라고 하는 것도 자칭이고 학교에서는 학생에 의한 자주적인 클럽이야. 그러니까 예산도 나오지 않아.

2년 전에는 제대로 된 부였다고 해서 그 시절의 부실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뿐이야. 사실은 이것도 무단이지.”


마음은 깊숙이 시창작 세계를 사모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실제로 시낭송을 염출하려면 예산과 설비가 필요해. 아 안타깝다, 안타까워.”


이것은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2학년이 되어서 3명이서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원하다보니 1년 전에 없어진 시낭송부에 주목하게 되었다.

단지 그 정도의 이야기다. 겐지가 시낭송에 흥미를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들은 지금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그쪽의 형편이 나쁘다면 시간 간격을 두겠습니다만 어떻게 할겁니까?”


카츠아키한테 질문을 받아, 칸다는 잠깐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괜찮겠지. 오늘은 5교시까지 수업이 있으니……


뭔가 말하기 시작한 칸다는 문득 말을 잘랐다.


미안, 아무것도 아냐. 그럼, 지금부터 잘부탁할게.”

 

역에서 나온 우리들 4명은 포장된 도로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시골은 아니지만 도회지라 말하기도 어려운 우리들이 살고 있는 거리는, 대략 세 지역으로 나눠져 있다.

신칸센이 지나는 큰 역을 중심으로 오피스빌이나 백화점이 줄지어서는 중심가.

집이 많이 있는 주택가.

거기에 넓디넓은 전원 지대에 공장이나 대형 샵이 점재하는 교외.

이 세 지역이 도너츠 모양이 되어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요컨대 그다지 특징같은 건 없는 어디에나 있는 거리다.

구태여 말하자면 바닷가가 있으니까 여름이 되면 해수욕하러 갈 때 편하다는 것이 이점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다니는 스이쇼 고등학교는 중심지하고 주택가의 경계쯤에 있다. 지하철로 통학하는 학생은 많다.

칸다도 예외가 아니어서 학교 근처 역에서 지하철를 타고 세 정거장쯤 지나, 거기서부터 10분정도 걸어야 자택에 도착한다고 한다.

참고로 나, 겐지, 카츠아키 세 명의 집은 역에서 한 정거장 더 간 곳에 있다.

옆집은 아니지만 동회의는 같이 할 정도로 근처다.

아무튼 평상시 지나치는 역에서 내리고 아스팔트에서 반사되는 오후의 태양에 이마의 땀을 몇 번씩 닦으면서 칸다에 집으로 향했다.

적당히 잡담을 하는 한중간에 문득 생각이 나서 나는 칸다한테 아무렇지 않게 물어봤다.


남자만 3명이 방문하다니 칸다의 가족한테 폐를 끼치는 거 아닐까?

부모님이라든가 별로 좋아하실 것 같은 않은데.”


괜찮아.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계시니까.”


돌아온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말.

하지만 나는 주위의 온도가 급속도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지.

내가 대체 뭘 물어본 거지.

용사의 가족을 모두 죽인 것은


아버지는 회사에서 언제나 밤늦게 오시고, 어머니는 바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찾아서 일하고 계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라, 갑자기 멈춰서서 왜 그런거야?”


,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칸다에게 거리를 둔 겐지와 카츠아키의 소리를 죽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둘을 강렬하게 노려보면서 나는 또 물어봤다.


어머니가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저녁밥은 매일 칸다가 만드는 거야?”


만드는 날도 있지만, 매일 그런 건 아니야. 시간제 아르바이트도 매일이 아니고,

거기에 순번도가 아니라, 저기, 그게, 있잖아…….”


갑자기 횡설수설하는 칸다.

어쩐지 뭔가 거북한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 생각은 조금도 없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 한두 개 정도는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려고 할 정도로 나는 나쁜놈이 아니다.


그런데 덥구만. 벌써 9월 한중간인데 이 열기, 너무 끈질기다고. 신체가 녹아버리면 어쩔거야.”


자판기에서 산 청량음료를 한번에 마신 겐지가 투덜거리니, 카츠아키도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면서 말했다.


녹색 액체라도 된다면 난처하겠네요.”


예전 합성수가 말하니까 농담으로 들리지 않아 리액션하기 곤란하다.

 오늘이 특히 더운 것은 사실이다.

8월 여름이 한창일 때와 같거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더위로 인해 체력을 빼앗기고 있다.

남자 3명은 마침내 헐떡거리며 입으로 숨쉬기 시작했다.

과연 우리들은 이정도로 허약했던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빛의 파동을 발하는 인물과 같이 있으니까 더욱더 피로가 빨리 오는 것이다. 현재 칸다는 그다지 지쳐 보이지 않는다.


곧 있으면 집에 도착하니까, 조금만 더 힘내.”


아무것도 모르는 피곤함의 근원은 기운차게 격려하고 있다.

그러자 조금이지만 햇살이 약해진 느낌이 들었다.

지면을 봐도 그림자 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하늘을 우러러봐도 태양이 구름에 가려진 것도 아니다.

그냥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더위가 누그러져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피로감이 점차 줄어들었다. 흐트러진 호흡도 원래도 돌아왔다.

그것은 걸을 때마다 명확해져서 더 이상 기분 탓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설마, 칸다가 격려해줘서 그런건가?

예전 세계에서 용사의 격려는 주위의 인간들을 분발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용사의 말은 수많은 지원군보다 더 용기를 줘서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동료들을 다시 일어서게 했다.

그 현장은 이 눈으로 여러 번 봤었다. 그것이 지금도 발휘되고 있는 것일까?


, 너무 쳐다보지 말아줘…….”


부끄러운듯한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도 모르게 칸다를 뚫어지게 쳐다본 것 같다.

여름의 더위만이 아닌 이유로 빨갛게 된 얼굴이 문자 그대로 코 닿을 데 있었다.


, 미안! 더워서 좀 어지러웠던 것 같아.”


나는 변명을 하면서 황급히 칸다로부터 얼굴을 떨어트렸다.

위험했다. 저대로 이끌렸으면 변태가 될 뻔했다. 그리고 체포와 재판을 통과하고 형벌이 빨리 집행되서, 빛의 파동을 직접


어라?”


거기서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챘다.

직접 만져진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로 근접해 있는데 말 걸어주기 전까지 멍하게 있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있을 리가 없다. 빛의 파동을 가까울수록 강해지니까.

그 독특한 기분 나쁨이 나를 덮칠 때 그 시점에서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칸다가 파동을 방출 못하게 됀건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파동은 칸다가 의식하지 못하고 방출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멈출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대답은 단 하나다.


빛의 파동이 상쇄당하고 있다.


이봐, 강렬하게 나쁜 예감이 드는데, 내 기분 탓일까 이거.”


설마, 그런, 그렇죠? 그런 일이, 있을 리가……아니, 있으면 안되는데…….”


내 생각이 옳다면 겐지와 카츠아키도 피로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에서 그것을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 있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갑자기,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자기 빛의 파동이 상쇄되고 있다니.

있어서는 안된다. 있어서 좋을 게 없다. 역시 그냥 기분 탓이다.

빛의 파동은 지금도 불쾌감과 아픔을 이쪽으로 전달하고


있지 않…아.”

호흡이 짧아진다. 눈 아래 근육, 거기다 목이 실룩실룩 떨린다.

뜻밖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돌연히 덮쳐 온 큰 사건. 이건 뭔가 잘못됐다, 잘못된 거야.

필사적으로 그렇게 타이르면서도, 겨우 한줌만 남아있던 이성이 멋대로 주위를 찾기 시작했다.

옛날의 힘이 조금 남아있다고 해도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떨어져있는 인간을 기색으로 찾으려고 하다니, 그런 재주가 가능할 리가 없다.


다만 두 가지 예외가 있다.

하나는 빛의 파동을 방출하는 인물. 불쾌감에 의지하면 어디쯤 있는지 찾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나머지 두 번째 예외는.


언니! 어서와.”


건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유리 구슬처럼 되어있을 눈으로 바라봤다.

바로 오른쪽의 아담한 집문이 열리고 거기서 귀여운 얼굴의 여자애가 보였다.


, 마나. 다녀왔어. 약속대로 모두를 불렀어.”


고마워, 역시 언니야! 하지만 꽤 빨랐네?”


그러네, 학교가 끝나고나서 바로 왔으니까.”


그럴거면 전화해줬으면 좋알을 텐데.

아직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거실이 정리가 안되서, 흐트러진 채란 말이야.”


, 그렇구나? 그럼 들어오라고 하기 전에 정리해야겠네. 금방 끝나지?”


! 언니와 함께라면 금방 끝나.”

그러면 정리하자. 미안, 빨리 정리할 테니까 조금만 여기서 기다려줘.”


말을 남기고 칸다는 문 안으로 사라졌다. 문틈에서 살펴보던 여자애의 얼굴도 안보이게 되었다.

그 뒤에 3명이 남겨졌다.

서있는 채로, 아무 말도 못하는 3명이.

현관의 처마 밑에 그저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습기 가득 찬 미지근한 공기가 뺨을 어루만졌다.

그것으로 나는 정말로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양쪽의 한 명을 지정하지 않고 말했다.


, 나 지금, 어떤 표정하고 있냐.”


모릅니다.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 얼굴도 보지 말아주세요. 보면 절교입니다.”


마나라고 하는 것 같구만. 게다가, 언니라고 말했어. 칸다의 여동생인 것 같은데.”


사이좋은 자매 같네요. 사이가 좋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무척 좋아요.”


세일러복 입고 있는 걸 봤어.”


근처 중학교의 교복이네요. 귀엽다고 평판이 자자합니다.”


중학교인가. 그렇다는 건 중학생이구만.”


, 중학생이네요.”


다음에 할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이전에 내가 지금 어떤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현실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것이 아니다. 대체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어둠의 일족을 거느려 인간세계를 침공해, 공포와 지배를 널리 땅에 떨치고,

우리들을 티끌처럼 처리한 용사를 상대로,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던 마왕님.

그 마왕님이, 용사의 여동생이 되어있었다니.


, 써놓을 걸 그랬어. 유언시…….”


누군가 그렇게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차를 달여올테니까 다들 소파에 앉아있어.”


말을 남기고 칸다는 거실에서 모습을 감췄다.

현관에서 5분정도 기다린 우리들은 칸다한테 안내를 받고 칸다의 집 거실에 들어갔다.

서양풍의 거실은 각별히 넓은 건 아니지만, 어질러져 있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거기에 배치되었던 가구도 좋다. 잘 모르겠지만, 주인의 센스가 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특히 음악 컨포넌트를 얹어놓은 저 나무로 만든 선반이 좋다. TV의 해외 드라마에서 비슷한 것을 언뜻 본 적이 있다

그 드라마는 영국에서 만든 거니 이 선반도 영국 양식일 것이다.

내 감정의 의하면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어쩌먼 현지 장인이 손수 만든 일품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모서리의 놓여진 높은 조명도 멋지다. 왠지 모르게 등급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꺼져 있지만 전원을 켜서 켜서 밝힌다면 분명히 훌륭하게 거실 전체를 밝혀줄 것이다.


왜 그래? 그런 곳에 서있지 말고 앉아.”


어린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되돌렸다.

이 정도의 도피는 봐줬으면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문답무용의 현실에 마주 설 기력이 솟질 않는다.

재촉한 대로 타원형 테이블이 사이에 놓여있는, 3명이 앉을 수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 장소는, 칸다 마나의 바로 정면.


 그 쪽의 두 사람도!”


겐지와 카츠아키도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가은 소파에 앉았다.

3명은 얼굴을 숙이고,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 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나의 얼굴을 직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는 게 느껴진다밖은 저렇게 더웠는데, 여기는 너무나도 춥다.

하지만 에어컨을 지나치게 틀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본래라면, 이 인물마왕님이 방출하는 어둠의 파동은 우리들같은 마물한테 활력을 전해준다.

지금은 차를 달이러 간 칸다의 빛의 파동에 의해 태반이 상쇄되고 있지만 그래도 이쪽이 조금 더 가깝다.

조금 남은 파동이 상쾌한 기분과 함께 육체에 스며든다……일 터 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은 상쾌한 기분 따위, 어디서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은, 단 하나뿐.

칸다 마나, 다름 아닌 마왕님에 대한 공포.

그것밖에 없다.

에어컨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거실에, 소리가 울렸다.


뭔가 어둡네, 세 사람 다. 언니한테서 재밌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마왕님의 기대를 거스르고 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우리들은 소파에서 몸을 내밀어 테이블에 이마를 조아리고 있었다.


, 잠깐, 갑자기 무슨 일이야?”


모두, 차를와왓, 또 하고 있어! 다들 고개를 들어줘!”


그래, 들어줘! 내가 시킨 것 같잖아.”


우리들은 연료가 끊긴 로봇같은 움직임으로 얼굴을 들었다.


휴우. 저기, 언니. 언니한테도 이렇게 했다고 말했지? 이 사람들 조아리는 게 취미야?”


, 그렇지는 않다고 보는데……그래도 어쩌면 좋아할지도?”


어느 쪽이든 이상한 사람이네.”


두 사람은 소곤소곤 말했지만 우리들의 귀까지 확실히 소리가 닿았다.


, 어쨌든, 모두, 기다렸지. 차를 달여왔어.”


칸다는 쟁반에 놓여진 아이스티가 담긴 컵을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는다.

그 중 하나를 마나가 바로 입에 대었다.


, 오늘도 맛있어. 언니는 차를 달이는데 천재네.”


정말 맨날 그렇게 말하는구나. 어라, 다들, 혹시 홍차 싫어해?”


우리들은 무표정인 채로 머리카락을 마구 흩뜨리면서, 고개를 붕붕하고 옆으로 흔들었다.

어색하게 손을 뻗어, 불그스레한 갈색의 액체를 반컵정도 목에 부어넣는다. 맛있을 것 같지만 맛을 전혀 모르겠다.

컵을 제자리에 놓자 두 사람은 다시 소곤소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항상 이렇게 어두운 거야, 이 사람들?”


? , 아니. 그렇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좀 지쳐있는 것 같아……


세 사람 다 눈이 죽어있어.”


“피, 피곤해서 그래. 분명…….”


마나는 삿하고 우리들한테 시선을 되돌리고 격식 차린 어조로 말했다.


나는 언니의 여동생인, 칸다 마나라고 합니다. 중학교 2학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우리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


……잘 부탁드립니다.”


죽은 사람같은 목소리도 간신히 대답했다.


인사정도는 제대로 하자. 지쳐있다고 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 마나,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는 안돼.

모두하고 만나고 싶다고 말한 것은 마나잖아? , 사과해야지.”


……네에, 죄송합니다.”


카츠아키가 생기없는 눈동자를 칸다한테 향했다.


, , 사실 말하자면 오늘 권유는 마나가 한 말이야.

너희들에 대한 것을 마나한테 이야기 했더니 꼭 만나고 싶다고 집에 데려와달라고 해서

 저기, 마나, 모두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었지.”


있었는데, 말할 기분이 사라져 버렸어…….”


그런 말을 하면 안돼. 다들 모처럼 와줬으니까. , 착하지?”


마나는 우리들을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본 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언니가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여동생으로서 예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아무렇게나 던지는, 국어책 읽기같은, 감사의 말.

하지만 그 말은 내 마음을 크게 동요시켰다.


마왕님이 사의를 표하다니!? 유아독존,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 이하로만 생각하는, 그 마왕님이!?

뇌를 보이지 않는 망치로 후려쳐진 듯 했다. 이를 계기로 사고가 단숨에 움직인다.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라.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예를 표한 것만이 아니다.

아까는 잘 부탁한다고 인사도 했다. 게다가, 이 다음에는 뭐라고 말했지?

그래, 칸다가 재촉했다해도, 죄송하다고 말했다. 마왕님이 사과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아니,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절대로,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우선, 마왕님이 용사의 여동생으로 잘 있다는 게 아무리 사정이 있더라도 너무 이상하다.

마왕님이 빛의 파동을 못알아차릴 리가 없다. 이 세계에서 언니라고해도, 바로 처리버리는 것이 마왕님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쩐지 칸다를 따르는 듯하다나는 흘끗 눈을 치뜨고 마나의 얼굴을 훔쳐 봤다.

표정은 2살 위의 언니와 비교해서 꽤 어리다. 하지만 용모 그 자체는 역시 많이 닮았다.

그리고그리고, 닮아 있는 것이 얼굴만이 아니라면? 처지가 칸다하고, 아니 용사하고 같다면?


? 내 얼굴에 뭔가 묻었어?”


시선을 눈치 챈 마나가 이상한 듯 물었다. 나는 결심했다.


마나, .”


?”


나는 언니의 친구인 키타세 테츠지로. 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


눈알이 튀어나오는 거 아닐까하고 생각할 정도로 눈을 뜬 겐지와 카츠아키가 나를 본다.

마왕님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하고 소리를 내지 않고 말하고 있다.


, 만나서 반가워. 뭐야, 제대로 인사할 수 있었잖아.”


눈을 몇 번인가 깜박이고 가벼운 어조로 대답한 마나.

얼굴에서 왕창 뿜어져 나온 땀을 닦으면서, 나는 큰 모험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역시 그렇다. 마왕님도 용사랑 같은 상태다.

예전 세계의 기억을 잃은 것이다.


, 거기 두 사람도 이름정도는 알려줘.

언니한테 들었지만 자기가 직접 이름을 대는 것이 예의잖아.”


겐지와 카츠아키는 나와 마나의 얼굴을 금붕어같이 입을 뻐금뻐금거리며 번갈아 본 후, 떨리는 소리로 각자 이름을 댔다.

두 사람 다 이름을 말한 후 만나서 반가워하고 덧붙였지만, 마나는 거기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몸 안의 힘이 빠진다. 용사 때처럼 만세할 기력도 없다.

기쁨은 그 때와 비교하면 나으면 낫지 못하지 않을 텐데, 마음 속에는 자리 잡은 것은 살았다는 생각, 그것뿐이다.


, . 세 사람 다, 긴장한 것뿐인 거지? 언니한테 여동생이 있는 게 그렇게 의외였어?”


, 그래. 칸다가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칸다는 미안한 듯이 입을 열려고 했다. 그것을 감싸듯이 마나가 말했다.


내가 언니한테 말하지 말하고 부탁했어.

그럴 것이 집에 여동생이 있다고 알게 되면 권유를 사양할 거 아니야.

그럼 언니 갑작스럽지만, 괜찮지?”


벌써? 나는 괜찮은데 다들 어떨지…….”


긴장도 풀린 것 같고 괜찮다고 생각해.”


나는 무슨 일이야하는 시선을 칸다한테 향했다.


그게 말이야, 마나가 혼자서 모두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


너를 빼고서?”


. 학교에서 언니가 어떤 느낌인지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싶어.

그런데 언니가 있으면 말하지 못하는 것도 있잖아?

그러니까 언니는 자기의 방으로 가고 나 혼자서 이야기를 듣을거야.”


‘들을거다라고 해도,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기억이 없다고 판명되었다고 해도 마왕님과 진지한 이야기라니, 너무 송구하다.

하지만 거절하려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럼 언니는 방으로 가있어. 금방 끝날테니까.”


, . 미안해, 모두. 조금만 마나의 상대를 해줘.”


마나는 등을 미는 듯 칸다를 거실 밖으로 내보냈다.

기억이 없고, 모습도 말투도 그 시절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강행하는 성질만은 같은 것 같다.

초청의 이야기가 갑작스러웠던 이유도 왠지 모르게 이해됬다. 분명 마나가 오늘 바로 만나고 싶다고 칸다를 밀어붙였을 것이다.

마나는 다시 소파에 앉고는 테이블 너머 우리들을 지그시 바라본다. 평가를 하는듯한 시선이었다.

아직 우리들 세 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언니에 대한 것을 물어보고 싶다고 했지만 뭘 말해야 되는 걸까.

마왕님이 아니라고 해도, 친구의 여동생이라는 잘모르는 인물과 이야기해야 한다는 이 상황은 왠지 모르게 거북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찬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사와 같이 마왕님도 기억이 없다. 대체 왜 그런 것인지, 마나한테서 답을 얻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기억이 부활하는지, 그 힌트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야기를 진행하면 좋을지 생각하면서, 나는 신중히 말을 선택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래서 어때, 상황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지그시 보기만 했던 마나가 그렇게 물어봤다.


……상황?”


그래. 상황을 보고해봐.”


보고라니……무슨 상황을?”


무슨이라니 정해져 있잖아.”


마나는 여기서 히죽 웃고는 말했다.


세계정복의 진행상황. 내가 무엇을 하려고 이 세계에 왔는지,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을 때, 겐지와 카츠아키가 위를 바라봤다.

입을 뻐금 열고, 눈에서 검은 부분이 사라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라고 물어보려는 순간에 정면에서 천장이 보였다. ‘왜 그런거지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모든 것이 멀어져갔다.

 



먼 곳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래도 자고 있던 것 같다.

악몽을 꿨다마왕남이 왠지 용사의 여동생이 되어있는 꿈.

꿈이라고 해도 너무 현실감이 없고, 게다가 농담이라고 해도 웃을 수가 없다.

하지만 꿈이라니까 그걸로 상관없다. 이렇게 눈을 뜨면, 안개처럼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신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 때 배 근처에 기묘한 것이 있는 게 보였다.

하얗고 늘씬한 그것은, 인간의 다리였다. 나는 아직 덜 깬 머리로 다리 앞을 주시했다.

거기에는 스커트 있고, 세일러복이 있고, 그리고 화난 표정을 지은 여자애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틀림없이 꿈에서 나온.


일어나. 초대받고 나서 기절하다니, 실례잖아.”


낮은 목소리와 함께 다리에 힘이 집중되어, 힘껏 복부가 눌러진다.

그것으로 의식이 선명하게 되었다.


꿈이 아니었나!?”


나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당황하며 좌우를 보니, 겐지와 카츠아키도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그리고 둘은 시선을 마나한테 돌리고서로 껴안으면서 그저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나는 한숨을 쉬며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여러가지 할 말이 있지만, 일단, 제대로 앉아.”


우리들은 모여서 소파 위에 정좌했다. 머리 안은 혼란스러웠다.

칸다의 여동생이 마왕님으로, 그런데 마왕님은 기억을 잃고 있는 것 같았는데, 세계정복에 대해서 물어봤다.

, 마왕님은 잊어버린 척을 한 것뿐일까. 아니면, 그 한마디만은 역시 꿈인 것인가?


저기


저기 말야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친다. 나는 자신의 타이밍 나쁨을 저주하면서 몸을 움츠렸다.


뭐야? 먼저 말해도 괜찮아.”


아뇨, 그쪽이 먼저 하셔도…….”


먼저 말해도 좋다고 말했을 텐데.”


그럼, 실례합니다……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만, , 기억하고 계신겁니까?”


무엇을?”


그러니까, ……옛날에 대한 것, 같은 것을. 예를 들어, 태어나기 전, 이라든가…….”


역시 대답을 듣는 것은 무서워서 말을 흐렸다. 그런 나를 향해서 마나는 똑똑히 수긍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 내가 마왕이고 당신들이 부하였던 시절이잖아.”


눈앞이 셔터를 내린 것같이 갑자기 새까맣게 되었다.


잠깐,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잖아! 일어나!”


그 노성에 나는 퍼뜩 의식을 되찾았다.

또 정신을 잃은 것 같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것은 또다시 화난 표정의 여자애. 칸다 마나였다.

그렇다는 것은 아까 전의 말은 역시, 역시나, 현실…….

기억이 없는 척을 했던 것은 마왕님의 장난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순간, , 그리고 겐지하고 카츠아키는 행동에 옮겼다.

, , , 하고 리드미컬하게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치는 소리가 세 번, 칸다가의 거실에 울렸다.


몰랐다고는 해도 정말로 죄송합니다!”


마왕님을 향해 건방진 입을 놀렸습니다. 부디 자비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우리들은 울부짖으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마를 테이블에 부딪쳤다.


잠깐……큰소리 내지마! 언니한테 들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아닙니다, 용서가 나올 때까지!”


저희들, 군단장의 지위를 반납하고 병졸부터 다시 하기로 각오했습니다!”


어리석은 저희들을 부디, 부디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만두라니까! 그만 좀 해라!”


탄원을 상회하는 노성이 나왔다. 세 사람의 머리가 불을 붙인 로켓 불꽃같은 기세로 올라갔다.

이 다음에 또 머리를 조아리면용서하지 않을 거야.

특히 언니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마.”


우리들은 오로지 목을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나는 자세를 고쳐 소파에 앉고서,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어차피 오해하고 있으니 말해두는 거지만, 나 더 이상 세계정복같은 거에 흥미 없어.

사실은 너희들과 만나는 것도 싫었으니까.”


나는 일순간, 사고가 먼 곳으로 데려가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정도로 의외인 선언이었다.


정말, 이신겁니까?”


당연하잖아. 뭐가 좋다고 예전의 나를 아는 사람과 만나겠어.

언니한테서 전학 첫날부터 엎드려 비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내 기분, 너희들은 알겠어?”


, 아뇨. 그 부분이 아니라세계정복에 흥미가 없다고 하셨나요?”


, 맞아. 그래, 이제 완전히 흥미 없어. 요만큼도 없어.”


나는 마음이 크게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마왕님이 정복에 흥미가 없다, 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어둠의 일족을 무릎 꿇게 만든 것으로 성에 안차서, 결국에는 인간세력까지 침공한 그 멈추는 것을 모르는 지배욕의 소유자.

그런 마왕님이.


뭐야, 그 얼굴은?”


너무나도 의외여서……. 의심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만, 또 장난을 치고 계신 건지……?”


이 세계에서 15년정도 살다보니 사고방식이 바뀌었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나는 그렇게 말했다.


, 그러면, 아까 전에는 어째서 세계정복에 대한 걸 저희들한테 물을셨던 겁니까?”


농담으로 한 말이야!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 못했다고.”


볼을 부풀리는 마나. 그 농담이라는 게 세 사람의 심장을 정지시켰다는 건 모르는 것 같다.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너희들은 아직도 세계정복하고 싶은거야?”


우리들은 동시에 힘껏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을 리가 없다.

확실히 이 세계에 막 다시 태어났을 때에는, 그런대로 할 생각이 있었다.

내 신체가 성장한다면 그 때가서 보자 인간들아하고 칙칙한 생각을 간직한 기분 나쁜 애기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성실한 사람으로 양육되면서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희미해졌다.

근처에 태어나 같은 유치원을 다니던 겐지와 카츠아키 앞에서는 그럴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지만

벌써 이 둘은 지겨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고 세계에 대한 것이 어렴풋이 보일 나이가 되고나니, 이번에는 그것이 물리적으로 무리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알렉산더 대왕도 칭키즈 칸도 나폴레옹도 이루지 못한 것을 우리들이 어떻게 하겠어.

애초에 세계정복이라니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올라서 세계각지에 군사침공을 하면 되는건가?

일단 선거에서 지겠지. 그럼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타파? 아니아니, 그걸 같이 할 동지는 어떻게 모을거야.

애초에 자칫 잘못되어 제일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해도 선전포고한 그 날에 미국에서 비행기가 날라오면 끝이잖아.

무리야 무리, 세계정복같은 건 그야말로 어린애의 꿈같은 거야. 그런 것을 꾀하는 녀석은 동화 속 세계만으로 충분하지.


이렇게 해서 나는 예전 일들을 몽땅 잊고, 이 세계에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과거를 떨쳐버리기 위해 겐지하고 카츠아키한테 자신의 심정하고 결별을 알렸을 때,

두 사람은 안심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역시 그렇지?라고

그 뒤로는 제2의 인생을 성실하게 만끽하는데 힘써서, 이 나이에 이르렀다.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지만 평화롭고 온화했다. 그러면서 그 나름대로 자극도 있고 학문에 완전히 빠졌다.

싸움과 피로만 물들었던 제1의 인생보다 수백배는 쾌적했다.


그러니까 두려웠던 것이다.

언젠가 용사가 우리들을 쫓아 나타나는 일을.

그리고 마왕님이 세계정복의 첨병을 또다시 우리들한테 명령하는 날이 오는 것을.


그럼 됐네. 너희들의 근성으로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만일을 위해서 못을 박아두려고 했어.

아직도 세계정복같은 바보같은 것을 꿈꾸고 있었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하고.

나는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잠깐 과거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 있던 내 귀에, 마나의 목소리가 닿았다.

마나의 표정은 무사타평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까 전 기억을 잃은 척한 것에 속아 넘어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전의 나쁜 소행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속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걸 본 것인지 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희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네.”


엄청 믿고 싶습니다만, ‘믿어라라고 하는 것이 무리라 생각…….”


“앗 너무해.”


귀하가 옛날에 하셨던 일들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 그야, 옛날의 나는 조금 흉악하고 난폭했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이거 설마 웃어야할 대목인가?

내 속마음과 상관없이, 마나는 갑자기 가슴을 뒤로 젖히고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나에 대한 것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생각해뒀어.”


증거, 입니까……?”


그래, 요컨대, 당신들은 옛날의 나를 무자비하고 냉혹한 악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신용할 수 없는 거지?”


, …….”


하지만 그건 큰 오해야. 그 시절의 나도 상냥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마나는 탁하고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앞에는 카츠아키가 있었다.


, 마계의 왕이지?”


자신만만하게 틀린 마나한테, 카츠아키는 곤혹스러워하면서 억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 합성수입니다…….”


? 그게 이렇게 잘 생겨진거야?

아무리 봐도 실패작이란 느낌이 들었던 그 수수께끼의 생명체가?”


……실패작? 신이었는데, 실패작……. 친위군단장이었는데, 실패작…….”


흐리멍텅해지며 어두워진 카츠아키를 무시하고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럼, 마계의 왕은.”


허공을 헤메는 손가락이 나를 가리킬 것 같을 때에, 겐지가 머뭇머뭇하며 손을 들었다.


저입니다……. 그리고 왕이 아니라, 대공작입니다…….”


, 역시. 아까 틀렸던 것은 그냥 농담이야. 하지만 이상하네, 왕 아니었어?

제일 높은 자가 대공작이라니 이상하잖아. 왕은 어디로 간거야?”


제가 왕이었지만, 마계가 마왕님한테 항복했을 때 왕의 지위는 반납했습니다…….”


어라, 그랬던가? 왜 그런 짓을 한거야?”


왕이 둘이라니 참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한 후에 제왕을 칭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 네놈을 강등하겠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사건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그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왕과 공작의 중간인 대공작이 일부러 신설되어 겐지는 그 지위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먼 옛날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마계의 왕가가 무너져는 동시에,

이 일은 마계의 땅뿐만 아니라 모든 어둠의 일족 그리고 인간세계까지도 뒤흔들게 되었다.

마나는 반복해서 눈을 깜박이고는 갑자기 오른손을 입가로 누르고 어색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정말로 잊고 있던 것 같다.


, 그랬지. , 지금이라도 왕이 될래? 난 상관없으니까.”


이제, 괜찮습니다……. 영토도 가신도 없는데 왕이 되어봤자…….”


, 그래. 겸허하구나. 나도 억지로 시키지는 않을게.”


여기서 마나는 기분을 가다듬는 듯 헛기침을 하고는 소리쳤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마왕군에 편입되고 난 뒤, 마계의 왕좌에 복귀하는 것이 겐지의 원동력이었다.

그것만을 염원하며 싸워왔던 것은 누가봐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마왕님에게 있어서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계의 대공작!”


무슨 일입니까?”


당신, 나한테 모반을 일으키려고 한 적 있었지.”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입을 떡 벌린 겐지의 얼굴이 있었다.

그 건너편의 카츠아키하고 눈이 마주쳤다. 시선으로 알고 있어?’라고 물으니, ‘아뇨하고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런 교환을 모르고 마나는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이어서 말했다.


너는 나한테 마계를 빼앗긴데 앙심을 품고 모반을 꾀했지. 하지만 유감이야.

전부 꿰뚫어보고 있었어. 곧바로 처형하고 당신의 악마군단은 돌아올 희망이 없는 전선에 전부 다 보내버릴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직전에 단념했지. 왜 그런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마나는 바로 이때라는 듯 가슴을 폈다.

그건 말이지 그런 짓을 하면 네가 불쌍하니까!

어차피 너는 나한테 이길 수 없고, 좀 더 상태를 봐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어!

어때, 이걸로 알았지?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만약 내가 너희들이 생각한 것같이 한 조각의 상냥함도 없는 마왕이었으면, 너는 여기에 없었어.”


득의양양한 미나. 나는 다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겐지의 뺨이 병자같이 창백하게 되어있었다. 그 핏기없는 입술이 움직였다.


저기……자비를 내려주신 건 감사하지만……꾀한 적 없습니다, 모반…….”


숨겨도 소용없어. 나는 전부 알고 있으니까. 이제와서 어떻게 할 생각도 없어, , 자백해봐.”


겐지의 상반신이 휘청휘청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스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마왕님한테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진짜 모릅니다. 정말로…….”


너무 가여워서 들을 수가,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마나도 간신히 이상한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이 카츠아키 쪽을 보았다.


겐지군의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사실은 모릅니다…….”


? 아니, 그게 있잖아 상륙군단장, 기억하고 있지? 해적 출신의 반어인.

그 녀석이 악마군단장의 움직임이 불온하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겐지군의 지위와 공적을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카츠아키의 말로 기억이 났다. 확실히 그 반어인은 겐지만이 아니라, 나와 카츠아키를 보는 눈도 이상했던 기분이 든다.

당시의 나는 격하의 시선따위 하나하나 신경쓰지 않는 성질이었으니까 단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잠깐, 합성수! 내가 녀석한테 속아넘아갔다고 말하고 싶은거야?”


아닙니다, 그한테 그런 배짱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왕님을 속였다는 것이 발각되면 일족의 무리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죄니까요.

몹시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별거 아닌 밀고로 예를 들면 악마군단이 상륙군단하고 분쟁을 일으켰다든가,

그 정도의 보고가 마왕님의 생각 속에서 부풀어진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두려워하면서 카츠아키가 고하니, 마나는 팔짱을 끼고 무엇인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지나서 뭔가 떠오른 듯한 표정이 되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모반이라고 까진 말하지 않았던가.”


어깨에 푹하고 힘이 빠지는 동시에, 옆에서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분발했는데, , 없는 죄로 처형될 뻔한건가, 나는……. 살아난 건 마왕님의 변덕 덕분인가…….”


……아니, 있잖아? 이건 달라. 이것도 그냥 농담이야. 오랜만에 재회했으니까 분위기를 온화하게 하려고 생각한 것 뿐이야.

내가 너희들한테 오라고 한 것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마나가 끝까지 말하기 전에 겐지의 눈이 뒤집혀, 신체가 소파에서 흘러내려 떨어졌다.

 

완전히 눈이 돌아갔네요.”


쓰러진 채로 움직이지 않는 겐지의 얼굴을 거리낌 없이 손으로 두드리고 꼬집은 카츠아키가 그렇게 보고하니,

마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 정말로 마계의 왕이 아니라 대공작이었던 그 녀석이야? 마계의 귀족들이 이 꼴을 보면 한심해서 울 것 같네.”


그 부분은 저로서는 뭐라고 드릴 말씀이…….”


, 됐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거대로 시끄러울 것 같고, 이 녀석은 이대로 자도록 놔두자.

내가 이제부터 이야기 하는 것을 너희들이 나중에 전해줘.”


그렇게 말하고 마나는 후유하고 숨을 한번 내쉬고, 그 뒤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건, 옛날이야기를 하기 위한 게 아냐.

너희들한테 꼭 전해야 될 것이 있어서 그래. 언니에 대한 거야.”


, 무엇입니까?”


그 전에 물어볼게 있는 게, 너희들은 언니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나는 카츠아키하고 시선을 교환한 후 대답했다.


예전 세계의 기억을 잃은 용사가 아닌지…….”


반은 정답. 하지만 반은 틀렸어.”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순서대로 설명할게. 우선, 내가 차원의 경계를 통과한 건 용사와 거의 동시에.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태어난 건 용사보다 2년 뒤야. 이것은 이해할 수 있어?”


나는 수긍했다. 이것은 실제 예가 있으니까 안다.

상하좌우도 앞뒤도, 애초에 시간이 미래로 향해 있는 건지 아닌지도 불확실한 그 공간.

구조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지만 같은 때에 통과했다고 해도, 꼭 그것이 이 세계에서 같은 시간에 있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나하고 겐지하고 카츠아키 3명도 대체로 동시에 차원의 경계를 통과했지만,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어난 나는 이 세계에서 자신의 언니가 용사인 걸 바로 알았어.

당연히 용사도 여동생이 예전의 숙적인 것을 알았지.”


저기, 언니는 칸다씨가 아니라, 용사였습니까?”


:. 그 때는 아직 그랬어.“


잘 모르겠습니다만……그래서, 용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라니, 그야, 나하고 싸웠어. 마왕하고 용사가 만나면 싸우는 것 말고 뭘 하겠어.”


, 0살하고 2살이였죠? 대체 어떻게 해서?”


파동하고 파동을 서로 부딪쳐서.”


마왕님하고 용사가 아니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는 마나.


그래서 그 싸움은 내가 이겼지만.”



, 뭐라고 하셨습니까?”


? 어느 부분?”


싸움은, 어떻게 된 것인지……?”


내가 이겼는데, 그게 왜?”


짧은 대답에 나는 뜻하지 않게 말이 막혔다.


……뭐야, 그 의외라는 듯한 얼굴은. 설마 내가 질거라고 생각한거야?”


,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이기셨습니까? 그 용사한테……?”


, 이겼어. 파동을 다루는 싸움이라면 내 쪽이 확실히 위야.

빛의 파동의 방출을 제어조차 못하는 용사한테 질 리가 없잖아.”


나는 예전 세계에서의 최후를 떠올렸다.

원한이 남아 혼만 존재하게 된 겐지, 카츠아키하고 같이 용사한테 매달리려고 했으나 빛의 파동에 간단히 튕겨져 나왔던 시절을.

그 용사의 파동을 두고 질 리가 없다고 말하는 마나.

우리들의 실력은 마왕님 다음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그 나름대로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왕님은 더더욱 규격외였던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하지만, 혼까지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만은 나한테도 불가능했어. 그건 역시 용사라는 거겠지.

그래서 기억에 봉인을 걸기로 했어. 두 번 다시 전생을 떠올리는 일이 없도록, 강력한 봉인을.”


그럼, 칸다는…….”


언니는 모든 기억을 잃은 용사 위에 생겨난 인격. 하지만 보통 2살 때 같은 건 기억하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언니라 할 수 있어. 어때 이해됐어?”


갑자기 목이 마른 느낌이 들어서, 나는 남은 아이스티를 단숨에 쭉 들이켰다.

컵을 놓고 어중간하게 수긍했을 무렵, 카츠아키가 마나한테 물었다.


마왕님이 직접 봉인했다는 것은, 용사의 기억이 되살아날 가능성은 아예 없다.

라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 질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 그런 건가.

슬픔으로 부활한다느니 뭐라느니, 이제까지 걱정했던 것은 헛수고가 되지만 아예 가능성 없다면 그게 제일 낫다.

하지만 마나는 얼굴을 흐리게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 어둠의 파동을 멈춰볼게.”


마나는 어깨에서 힘을 빼는 몸짓을 했다. 그러자 내 팔에 닭살이 돋았다.

가슴에는 조금이지만 불쾌감이 치솟고 있다.


, 느껴지지? 2층에 있는 언니가 내보내는 빛의 파동이.

이것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용사의 힘이 아직 건재하는 거야.

기억이 봉인된 것뿐으로, 언니 안에서는 존재하고 있어.”


말을 중단한 마나가 눈꺼풀을 내리고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그것으로 닭살하고 불쾌감이 사라졌다.

어둠의 파동의 방출이 다시 재개되었던 것이다.


용사의 기억이 부활한다면 다시 싸워서 이기면 돼.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언니는 없어져. 용사한테 기억이 덮어씌워져서.”


덮어쓰기라니, 칸다의 기억이 없어진다는 소리입니까?”


그래. 기억이 용사의 것으로 바뀌어 놓여져서, 이제까지 이 세계에서 있던 것을 전부 잊어버리게 돼.

 언니는 어디에도 없게 되는 거야.

봉인이 간단히 풀릴 리는 없겠지만 예전 세계에 대한 것을 언니가 알게 된다면그것으로 혼이 동요해서 봉인이 풀릴 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희들은 절대로 언니 앞에서 예전 세계의 대한 것을 말하지 말아줘. 부탁할게.

그것을 말하려고 오늘 너희들을 오게 한거야.”


나하고 카츠아키는 순순히 수긍했다.

잊고 있을 테니 떠올릴 계기를 주면 안된다는 우리들의 필사의 배려는, 결과적으로 대정답이었던 것이다.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용사였던 것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예전 세계의 일도 우리들의 과거에 대한 것도, 일체 말하지 않을테니까요이제부터 말할 생각도 없습니다.”


, 그렇게 해줘. 용사가 부활해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거기서 우리들은 어떤 일을 떠올렸다. 예전 세계에 대한 것을 의식시키면 안된다, 그 명령을 이미 위반했을 지도 모르는 일을.


사실은, 마왕이나 마장에 대한 단어를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


언니한테서 들었어. 그건 괜찮다고 봐.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것을 말했을 뿐이니까 의미가 없다고 얼버무렸으니까.”


남아있던 옛날의 힘을 사용해버렸습니다. 눈 감고 있도록 했지만…….”


그건 꽤 위험해. 당신들이 가지고 있던 힘은 조금이라도 해도 예전 세계와 관계가 있잖아.

하지만 어째 됐든 말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허접한 수준이고,

언니는 당신들의 우스개 소리같은 변명을 마음 속에서 신용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변명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 이상 괜찮을 거야.”


‘허접할 정도로 약해서 다행이다하고 안심하고 있었으나 마나는 눈빛을 날카롭게하고 계속 말했다.


하지만! 한 번이니까 괜찮은 걸지도 몰라. 두 번 다시 쓸데없는 것을 묻거나 힘을 사용하거나, 하지 말 것!

그리고 만약 너희들만으로 힘에 겨운 일이 발생한다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

나한테 전할 말이 있다고 언니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제대로 에둘러서 말하는 것을 잊지마.

마왕님께 전언을 부탁합니다라든가 말한다면.”


……말한다면?”


실컷 때려눕힐 거야, 이렇게.”


마나는 붕붕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 어린애같은 행동에 나는 몸을 떨었다.

사소한 죄로 처형당한 몇몇 동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손을 멈춘 마나는 지친 듯 컵을 입으로 옮겼다.

그것이 테이블에 놓일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머뭇머뭇 물어봤다.


저희들로는 힘에 부칠 일이라니,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몰라.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어. 하지만 생각해봐.

이 넓은 세계에서 나와 언니가 너희들하고 이렇게 우연히 만났어.

확률적으로는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을 텐데 말이야. 뭔가 인연이 끌어당기고 있다든가

또는 우연히 만난 것으로 운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든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아?

이제부터 뭔가 일어난다고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해.”


허어……. 운명, 입니까. 그건 또 대단히 소녀틱한 말이군요…….”


지금의 나는, 소녀잖아!”


노성에 몸을 움츠린 카츠아키가 추수리는 듯 입을 열였다.


하지만 놀랐습니다, 마왕님하고.”


그렇게 부르는 건 그만해. 자기소개 했잖아.”


, 실례했습니다. 마나 씨하고 용사가 자매라니, 상상도 못했습니다.

빛의 파동은 괜찮은 겁니까? 칸다 씨가 전학한 날에, 저희들은 죽을 것 같았습니다만…….”


아무렇지 않아. 평범하게 어둠의 파동으로 지울 수 있는 걸.

아까 같이 일부러 방출을 멈춘 것은 특별한 거지만, 그런 짓을 할 의미도 없으니까.”


그것은 다행입니다…….”


거기서 침묵을 지키던 카츠아키를 마나가 반쯤뜬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래서 뭐가 궁금해?”


?”


, 가 아니야. 지금 거는 물을 필요도 없었잖아.

뭔가 실마리를 잡아 다른 것을 물을 생각이었지? 똑똑히 말해봐, 뭔데.”


이런 날카로운 부분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게, 저희들은 예전 힘의 태반을 잃어서, 말씀하신대로 허접한 수준으로는 남아있지만,

마나씨는 어느정도일지, 약간 신경쓰여서…….”


약간이 아니다. 나는 계속 그것이 알고 싶었다. 카츠아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뭐야, 그런 거였어. 으응, 대략 반정도일까.”


간단히 말하는 마나. 하지만 내 신체를 경직시키기에는 충분했다.


, , 입니까?”


신체를 사용하는 것은 아예 안되지만, 어둠의 파동을 다루는 것으로 따지면 그 정도일까.”


, 그것을, 행사하실 생각은……?”


무슨 소리야? 반이라고 해도 조금 제대로 발휘하면 사람 한 명이 흔적도 없이 소멸돼버린다고.

어설프게 하면 거리 한 개정도 날려버릴 지도 모르고. , 하지만.”


, 하지만!? 아직 뭔가 있는 겁니까?”


마나는 꾹하고 주먹을 쥐고서 몸 앞으로 내밀었다.


언니를 슬프게 하는 녀석이 있으면, 절대로 용서안해!

모든 힘을 사용해서 지옥의 밑바닥까지 몰아붙일거야!”


우리들은 칼칼하게 마른 소리로 웃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목숨을 구한 것은 생각날 계기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행위만이 아니다.

하나 더, ‘칸다를 슬프게 하지 않을 것’. 이것도 빗나간 추측이었지만, 완벽하고 올바른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확정되었다. 앞으로도 칸다를 슬프게 하는 것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마왕님이 기억을 봉인한 것이 명확해졌어도, 우리들이 하는 일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을.


마나는 힘을 빼고는 손을 모았다.

, 질문 시간은 끝났습니다. 그 시시한 세계의 이야기도 이걸로 끝.

이제부터 모두가 즐거운 잡담 시간. 그럼, 언니를 불러올게.”


마나는 거실의 문을 열어 큰 소리로 언니를 불렀다.


, 한가지만 더 어쭙게 해주십시오!”


? 뭔데?”


세계정복에 흥미가 없다는 말씀, 믿어도 되겠습니까?”


믿어도 된다고 했잖아. 세계정복같은 건 이제 진짜 어찌돼든 좋으니까.”


빠른 어조로 물어본 나에게, 마나는 귀찮은 듯이 그렇게 대답했다.


반 남아있는 힘으로 세계정복에 도전하는 일도?”


없어, 없어. 도전한다고 해도 이 세계의 무력, 엄청 강하니까.

아무리 나라고해도 핵미사일에 이길 자신은 없어.”


그렇다고 해도 국가전복을 꾀하는 테러리스트정도는 충분히


테러리스트? 그거 사회나 환경에 불만이 있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되는 거지?

불만같은 거 하나도 없는데 왜 그런 게 되지 않으면 안되는거야.

불만은커녕 지금 나는 무서울 정도로 행복하니까 말이야.”


, 행복? 그건


톡톡하고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물고 늘어지는 나를 노려봐서 다물게 만드는 마나.

그리고 칸다가 거실에 모습을 드러내자, 우리들한테 과시하는 듯이 안겼다.


와왓, 갑자기 왜 그래, 마나?”


눈을 끔벅거리는 칸다. 거기에 마나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언니, 정말 좋아! 언니가 언니인 덕분에 마나, 매일이 행복해!”